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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Hilbert, Turing, and Von Neumann: The First Computer Architects #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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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힐베르트, 튜링, 그리고 폰 노이만: 최초의 컴퓨터 아키텍트

배비지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명령어와 데이터가 완전히 분리된 방식으로 저장되었다는 점입니다.
데이터는 회전식 숫자 계기를 이용한 레지스터에 저장되었고, 명령어는 나무 카드에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입력되었습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카드 재료 수백 장이나 기계 장치는 비싸지 않았지만, 고작 숫자 100개를 저장하기 위한 기계 장치는 훨씬 거대하고 비쌌습니다.

따라서 명령어와 데이터를 동일한 메모리에 저장해야 한다는 개념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명령어와 데이터를 동일한 곳에 저장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실제로 이 아이디어를 적용한 기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적용한 컴퓨터 구조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앨런 튜링(Alan Turing)입니다.
그러나 그 구조가 널리 채택되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입니다.

다비트 힐베르트

힐베르트는 당시 논란이 많았던 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의 집합론과 초한수(transfinite numbers) 개념을 받아들였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습니다.
이는 당시 학계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견해였기 때문에 힐베르트는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고, 오늘날 학계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힐베르트는 유클리드가 평면 기하학을 공리화했던 것처럼 수학 전체를 공리화하는 아이디어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1899년에 <The Foundations of Geometry(기하학의 기초)>를 출간했는데, 이 책은 유클리드보다 훨씬 더 엄밀한 형식으로 기하학을 공리화했으며, 이후 수학적 형식주의의 기준을 제시하는 기념비적인 출판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힐베르트는 단지 기하학을 공리화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일한 수준의 형식주의(formalism)를 전체 수학에 적용하고자 했으며, 소수의 근본적인 공리에서 모든 수학을 유도해 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힐베르트는 모든 수학적 질문에는 반드시 그 공리에서 도출할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묘비에도 이런 주장을 반영하여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라는 문구를 새겼습니다.

하지만 기하학 공리화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수학 전체를 공리화하려는 힐베르트의 목표는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1901년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집합론의 형식을 이용하여 참도 거짓도 아닌 명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힐베르트가 주장한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믿음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입니다.
즉, 러셀은 절대 논리적으로 해답을 알 수 없는 명제를 만들어 냈죠.

1928년, 힐베르트는 학계에 “수학은 완전하고, 모순 없이 일관되며, 모든 명제에 대해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라는 거대한 도전 과제를 내놓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증명된다면 수학은 참인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고, 모순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어떤 명제가 증명 가능한지 자동으로 판단해 낼 수 있는 완벽한 언어가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힐베르트의 이 장대한 포부는 결국 좌절됩니다.
그리고 그 좌절을 초석으로 하여 자동 계산(컴퓨테이션)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괴델

괴델은 자신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s)를 정식으로 발표합니다.
그가 사용한 증명 방식은 우리가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 사용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그 방식은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Principia Mathematica(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에 쓰인 논리 기호들을 자연수, 즉 양의 정수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괴델은 오늘날 프로그래머들이 하듯이 자신이 다루는 모든 대상을 정수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에 등장하는 각각의 기호에 고유한 소수(prime number)를 할당했고, 각 변수에는 소수를 거듭제곱한 다른 값들을 부여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괴델이 이런 방식으로 기호에 수를 할당함으로써 안의 모든 명제를 하나의 정수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완전성 정리로 형식주의 수학 체계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고 증명한 괴델은 이어서 힐베르트의 두 번째 도전 과제도 무너뜨립니다.
그는 어떤 형식적인 체계 안에서는 스스로 그 체계가 모순이 없음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즉, 수학 체계 내부에서는 어떤 명제가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경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괴델, 처치, 튜링이 힐베르트의 꿈을 무너뜨릴 때 사용한 증명 방식은 모두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들은 반복적인 절차에 따라 데이터를 변형해 나가는 방식, 즉 일련의 명확한 단계로 구성된 처리 과정을 이용했습니다.
개념적으로 보면 그들의 작업은 모두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같습니다.
즉, 괴델, 처치, 튜링은 프로그래머였고 힐베르트가 주창한 1차 논리 체계는 그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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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폰 노이만

그는 17세에 수학 분야의 첫 번째 논문을 발표했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 때 발표한 박사 학위 논문 “집합론의 공리화(The Axiomatization of Set Theory)”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찬사와 주목을 받았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괴팅겐에서 힐베르트와 함께 연구하며 1923년부터 이 도시들을 오가며 끊임없이 학업과 연구를 병행합니다.

오스월드 베블런은 프린스턴에 고등 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AS)를 설립한 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헤르만 바일, 폴 디랙(Paul Dirac),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쿠르트 괴델, 에미 뇌터 등 수많은 석학을 초빙했습니다.

지성들의 집단 속에서 폰 노이만은 1932년 <Mathematical Foundations of Quantum Mechanics(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이 책에서 폰 노이만은 특유의 수학적 정밀함을 이용하여 양자 입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숨겨진 변수(hidden variables)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또 양자 상태의 기묘한 중첩 현상은 극소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거시적 존재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폰 노이만의 책에 담긴 수학적 논증은 물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고양이가 동시에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을 수 있는가), 다중 우주 해석(many-worlds hypothesis) 같은 개념들을 촉진시켰습니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앨런 튜링

“우리는 능력 있는 수학자들이 아주 많이 필요해질 것이다.”

“우리 과제 중 하나는 적절한 원칙을 유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놓치지 않을 수 있다.”

  • 앨런 튜링, 1946년 런던 수학회 강연 중에서

튜링은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서 에딩턴(Eddington)과 G. H. 하디(Godfrey Harold Hardy)의 지도하에 응용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에딩턴 강의에서 영감을 받은 튜링은 중심극한정리에 대한 독자적인 증명을 완성합니다.
그는 1934년 11월 학부 졸업 논문으로 이 내용을 제출했고, 그 결과 케임브리지에서 연간 300파운드의 장학금과 숙식, 교수진과 함께하는 하이테이블(High Table) 식사 자리를 비롯한 다양한 혜택을 받게 됩니다.

그는 힐베르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폰 노이만, 괴델의 저작을 탐독했으며, 특히 힐베르트의 세 가지 도전 과제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러던 어느 날 M. H. A. 뉴먼(Maxwell Herman Alexander Newman)이 해당 주제를 강연하는 자리에서 튜링은 ‘기계적 절차에 의해’라는 말을 듣고 기계와 메커니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장거리 달리기를 마치고 들판에 누워 쉬던 중, 그는 힐베르트의 세 번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기계 장치를 활용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튜링-폰 노이만 아키텍처

당시에는 데이터와 명령어를 분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프로그램은 수많은 명령어로 구성되었고 천공 카드는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방대한 양의 숫자를 다루지 않았고 숫자를 저장할 수단은 매우 비쌌습니다.
게다가 데이터와 명령어를 동일한 메모리 장치에 넣는 것이 어떤 이점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앨런 튜링과 존 폰 노이만은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stored-program computer)를 고안합니다.
튜링의 기계는 놀랄 만큼 구조가 단순한 반면, 노이만의 아키텍처는 다소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두 방식은 프로그램(명령어)과 데이터를 동일한 메모리에 저장한다는 놀라운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컴퓨터 아키텍처에서 혁명적인 전환이었으며, 실로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튜링 머신

앨런 튜링은 1936년 “On Computable Numbers, with an Application to the Entscheidungsproblem(계산 가능한 수와 결정 문제에의 응용)”이란 논문에서 자기 이름을 딴 튜링 머신을 제시합니다.
이 논문의 목적은 힐베르트가 제시한 세 번째 과제, 즉 결정 가능성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임의의 수학적 명제가 증명 가능한지 여부를 일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한 것입니다.

전이표의 각 행도 그 행에 있는 모든 상태, 기호, 동작에 해당하는 숫자들을 그대로 이어 붙여 하나의 숫자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행의 숫자들을 다시 이어 붙이면 전체 프로그램을 하나의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튜링은 이 숫자를 Standard Description이라고 불렀고, 여기에서는 이를 줄여서 SD라고 부르겠습니다.

SD는 숫자이기 때문에 튜링 머신의 테이프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이 숫자는 이진수나 십진수, 혹은 다른 방식으로도 인코딩할 수 있습니다.
튜링은 자신의 기호에 맞게 1, 2, 3, 5, 7이라는 숫자를 조합하여 SD를 인코딩했습니다.

다음으로 튜링은 테이프에 기록된 SD를 실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범용 계산 기계(universal computing machine)이며, 여기에서는 U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제 SD가 인코딩된 테이프에 프로그램 U를 실행하면 그 SD에 인코딩된 프로그램의 수행 결과가 테이프 빈 공간에 출력됩니다.

상태 전이표를 실행하는 프로그램을 작성한 적이 있다면 U는 바로 그런 종류의 프로그램입니다.
U는 SD를 읽으면서 현재 상태와 기호에 일치하는 전이 행을 찾고, 그 행에 지정된 동작을 수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프로그래머 관점에서 볼 때, 튜링이 발명한 것은 바로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입니다.
SD는 테이프에 저장된 프로그램이며, U는 그 SD를 실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따라서 U가 기계화되어 인간이 아닌 자동 기계로 실행된다면, 그 기계는 그야말로 완전한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인 셈입니다.

폰 노이만의 여정

존 폰 노이만은 아마도 1935년에 앨런 튜링을 처음 만났을 것입니다.
이는 튜링의 “On Computable Numbers(계산 가능한 수)” 논문이 발표되기 바로 전 해입니다.
당시 폰 노이만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업무를 잠시 중단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튜링은 그의 몇몇 강의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튜링 작업에 대해 이야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탄도 연구소

유럽에서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던 시기, 존 폰 노이만은 탄도학(ballistics)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초기에는 찰스 배비지가 사용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수많은 여성 ‘컴퓨터(계산자)’가 탁상용 계산기를 들고 방 안에 모여 끝없이 덧셈과 곱셈을 수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현장을 살펴보며 폰 노이만은 “컴퓨팅 기계의 발전은 불가피하며, 장차 그 기계들은 인간의 뇌처럼 자율적인 처리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계들은 통신망, 전력 인프라, 대형 산업 시설 등 주요 대규모 시스템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라고 예견했습니다.
이런 폰 노이만의 예견은 그의 꿈이자 아이디어의 씨앗이었습니다.

1940년 9월, 폰 노이만은 탄도 연구소(BRL)의 자문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 수학회 산하 전시대비위원회의 수석 탄도 자문으로도 임명됩니다.
한마디로 그는 당시 여러 분야에서 손꼽히는 핵심 인재였습니다.

NCR 기계

출장 중에 폰 노이만은 영국 남서부 배스(Bath)에 있는 해군 연감 사무소(Naval Almanac Office)에서 NCR 회계 기계(NCR accounting machine)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기계는 키보드, 프린터, 레지스터 여섯 개를 갖춘 기계식 계산기입니다.
폰 노이만은 이 NCR 기계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런던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이 기계에 사용할 수 있는 보다 정교한 근사치 계산 ‘프로그램’을 작성합니다.

비록 증거는 많지 않지만, 그 시기에 튜링과 폰 노이만이 만나 컴퓨팅 기계에 대해 논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로스앨러모스: 맨해튼 프로젝트

1943년 7월, 여전히 영국에 머물고 있던 폰 노이만은 긴급한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그 편지에는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고, 서명자는 바로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였습니다.

사실 폰 노이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폭발 충격파에 관한 연구를 통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폰 노이만은 로스앨러모스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별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 누구보다도 미국 정부의 컴퓨팅 환경을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내폭 장치를 모델링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계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폰 노이만은 IBM에서 펀치 카드 계산기를 열 대 구입합니다.
이 장치들은 플러그판(plugboard)을 이용해서 프로그래밍되었으며 카드의 어떤 필드를 사용할지, 그 필드에 어떤 연산을 수행할지, 결과를 어디에 저장(펀치)할지를 지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컴퓨팅 기계에 대한 꿈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폰 노이만은 자신의 꿈을 로스앨러모스 곳곳에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과학자들과 관리자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과학연구개발국(OSRD)의 책임자인 워런 위버(Warren Weaver)에게 편지를 보내 더 빠른 계산 장치를 만들기 위한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에 위버는 폰 노이만에게 전기 기계식 컴퓨터인 하버드 마크 I의 책임자 하워드 에이컨(Howard Aiken)을 소개합니다.

마크 I과 ENIAC(에니악)

1944년 여름, 폰 노이만은 로스앨러모스를 잠시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에이컨을 방문하고 해군 고객들도 만나기로 합니다.
그는 애버딘 시험장에서 가까운 기차역 플랫폼에서 허먼 골드스타인(Herman Goldstine)과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허먼 골드스타인도 폰 노이만을 알아봅니다.
둘은 기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눕니다.
골드스타인은 자신이 현재 전기 기계식 릴레이 대신 진공관을 사용하는 계산 장치를 개발하고 있으며, 그 장치는 초당 300회 이상의 곱셈 연산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질 때 골드스타인은 폰 노이만의 방문 일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1944년 8월 7일, 폰 노이만은 에이컨을 방문하여 제한적인 시간 동안 마크 I의 사용을 허락받습니다.
이후 몇 주 동안 폰 노이만은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와 마크 I 팀과 함께 플루토늄 내부 폭발과 관련된 문제점과 해결책을 설계하고 프로그래밍하고 실행합니다.
마크 I은 폰 노이만이 우려하던 천공 카드 기반 계산기들보다 신뢰성은 높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속도는 훨씬 느렸습니다.
너무 느려서 폰 노이만은 이 기계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정도였죠.

폰 노이만이 마크 I 방문을 시작한 바로 그날, 폰 노이만은 기차역 플랫폼에서 만났던 허먼 골드스타인에게 초대를 받습니다.
며칠 후 폰 노이만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전기 공학부를 방문합니다.
그곳에서 거대한 전자식 기계를 보게 됩니다.
배선 뭉치, 스위치, 계기, 진공관이 1만 8,000개 장착된 회로 랙으로 구성된 이 기계는 폭 30피트, 길이 56피트, 높이 8피트의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죠.
그 기계 이름은 ENIAC(에니악)이었고, 폰 노이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폰 노이만은 천공 카드 계산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계를 관리하고 있던 젊은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의 뛰어난 조직력 덕분에 계산 작업을 완료합니다.

트리니티

수많은 계산과 모의 실험이 완료된 후 플루토늄 폭탄의 실제 폭발 테스트가 예정되었습니다.
이 폭발 테스트의 암호명은 트리니티(Trinity)로 불렸습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존 폰 노이만은 자신이 계산하고 이론적으로 기여한 폭탄이 폭발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의 아내 클라리는 당시 두려웠던 마음을 드러낸 남편의 말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클라리, 그 컴퓨팅 기계 말이야…… 그건 앞으로 저 원자 폭탄보다도 더 중요해질 거야. 아니, 필수적인 존재가 될 거야. 인류가 그 기술의 발전 속도를 감당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달은 물론 훨씬 더 너머까지도 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기계는 원자 폭탄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어.”

이제 그의 꿈은 싹을 틔워 단단히 뿌리를 내렸고, 마침내 꽃잎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슈퍼

어린 시절 헝가리에서 경험한 짧은 공산주의 체험은 그에게 소련이 다음 적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고,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더 크고 강력한 폭탄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와 함께 수소 폭탄, 이른바 슈퍼(Super) 개발에 착수합니다.

진정으로 계산 성능과 속도를 높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명령어와 데이터를 프로세서 자체보다 빠르거나 최소한 같은 속도의 매체에 저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프로그램은 데이터와 함께 저장되어야 하며, 프로그램 자체가 곧 데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ENIAC의 발명자인 존 모클리(John Mauchly)와 프레스퍼 에커트(J. Presper Eckert)는 폰 노이만이 ENIAC을 보았던 시기인 1944년 8월에 이미 새로운 컴퓨터인 EDVAC(에드박)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에커트는 그 당시 레이더 시스템의 배경 소음을 기록하거나 제거하는 수은 지연선(mercury delay line)을 발명했는데, 바이너리 데이터를 대량으로 저장하는 데도 수은 지연선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NIAC의 진공관 대부분이 메모리 용도였기 때문에 수은 지연선 메모리를 사용하면 진공관 수를 대폭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EDVAC의 비용 절감과 신뢰성 향상, 용량 증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을 폰 노이만과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 폰 노이만은 EDVAC 프로젝트에 자문 역할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EDVAC 설계 초안

1년도 채 안 되어 폰 노이만은 ‘EDVAC에 관한 초안 보고서’라는 흥미로운 문서를 작성합니다.
이 보고서는 컴퓨터를 입력, 출력, 연산, 제어, 기억 장치 이렇게 주요 구성 요소 다섯 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중에서 제어 장치는 기억 장치에 저장된 명령어를 해석하고 값을 연산 장치로 보내 계산한 후 다시 기억 장치에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구조는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튜링은 폰 노이만의 보고서를 읽고 맨체스터에서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 자동 계산 장치) 설계를 시작합니다.
한편 폰 노이만의 관심하에 ENIAC 역시 구조가 개편되어 1947년에 새로운 형태로 가동을 시작합니다.

최초로 컴퓨터 프로그래밍만 전담하는 역할로 고용된 사람은 진 바틱(Jean Bartik: 본명은 베티 진 제닝스(Betty Jean Jennings))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ENIAC의 원년 프로그래머이자 운영자 중 한 명입니다.

폰 노이만의 아내 클라리 역시 프로그래머가 되어 로스앨러모스와 동부 해안을 오가며 텔러의 수소 폭탄(‘슈퍼’) 모델링을 위한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실행했습니다.
참고로 이 작업에는 폰 노이만과 스타니슬라프 울람(Stanislaw Ulam)이 고안한 몬테카를로 분석 기법(Monte Carlo analysis)이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집에는 다음 문구가 새겨진 명판이 걸려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한 사람”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문구 역시 그의 업적을 모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영국에서 개발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인 맨체스터 베이비(Manchester Baby)는 1948년에 윌리엄스 튜브(Williams tube) 메모리를 사용하여 가동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EDSAC은 1949년 수은 지연선 메모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모클리와 에커트는 대학교를 떠나 유니박(UNIVAC)이란 회사를 창립했는데, 이것으로 상업용 컴퓨터 산업과 본격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 보겠지만, 그 경쟁은 실로 격동의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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